생각의자

스물셋, 다시 일어서는 삶

극기상진 2017. 8. 23. 11:05


기어이 나는 병원에 실려 오고야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새벽 3시가 지나고 있다.

내 침대 아래 조그만 간이 침대에서 엄마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누워 계신다.

눈 붙이신 지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자글자글한 주름과 희끗한 머리..

엄마의 얼굴에선 세월의 고단함이 엿보인다.

이제야 내 병을 미워하지 않고 아무 원망없이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걸까.


병원 실려 오기 전에 나는 울며 미친 듯이 벌컥 벌컥 술을 마셨다.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마시면 큰일나는 줄 알면서도 마치 정상인인 양 술을 들이부었다.

엄마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저 '며칠 전부터 콜록거리더니 감기가

심해졌구나, 직장 구한다더니 신체검사에서 또 떨어졌구나.' 그래서 우울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입원한 것으로 생각하셨다.

물론 계속되는 취직 불합격과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심한 기침증세도 이번 입원의 원인 중 하나였다.


당뇨병! 그날 따라 인슐린이 든 주사기를 다리에 꽂을 수가 없었다.

열세 살 때부터 내 몸 이곳 저곳에 스스로 주사기를 꽂아야 했던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혈당검사를 하고 인슐린을 투여하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수히 고민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는 졸업식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져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인슐린 의존성 소아당뇨병'...

당뇨라면 뚱뚱한 성인들에게만 발병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생소한 병명에 무척 놀랐다.

"인슐린을 만드는 세포가 없습니다.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살아야 하고 모든 것에 철저한 조절과

주의가 필요합니다"라는 당시 간호사의 냉랭한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였는지 남들보다 나는 유난히 자주 목이 말랐다. 수업이 끝나면 세면장으로 달려가

누가 볼세라 수도꼭지를 입에 물고 물을 양껏 마셔야 했고, 곧이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온몸을 짓누르는 피곤함이었다.

차라리 아팠으면, 통증이라도 있었으면...


혈당 측정방법과 주사 놓는 방법을 익히지 않으면 퇴원을 못한다는 말에 천천히 피스톤을 눌렀다.

'몇 달만 지나면 괜찮을 거야. 내게 올 수 없는 병이야. 곧 나을꺼야' 하는 생각으로

눈 딱 감고 내 왼쪽 다리에 주사바늘을 찔렀다.

그리고 9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내 왼쪽 허벅지에 주사를 놓고 있다.

이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엄마의 얼굴이 유난히 작아 보인다.

올해 환갑을 맞은 우리 엄마, 또래에 비해 키가 컸던 나를 등에 업고 불편한 한쪽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앞만 보고 내달리셨던 엄마..

내 신발을 들고 머리맡에 앉아 수없이 가슴을 졸이시던 엄마..

그 엄마의 등에 업혀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다는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가...

지금도 엄마는 앰뷸런스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하신다.


지난번 엄마의 환갑 때에도 스물세 살이나 된 이 딸은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엄마, 내년에는 돈 벌어서 좋은 선물 해 줄께' 라고 했더니

엄마는 그런 소리 말고 건강하기만 하라며 나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셨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살림에 쉼 없이 들어가는 많은 약값이며 병원비...

주사약이 떨어질 때마다 잊지 않고 꼭꼭 서랍을 채워 놓는 부모님의 지친 어깨에 나는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엄마가 죄인이야"라면서 수없이 병원 문을 들락거릴 때마다 당신이 큰 죄를 지은양 고개를 떨구셨다.


부모님께, 또 식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줄 알면서도 그때 나는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쓰러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프면 입원하고 괜찮으면 퇴원하는,

고무줄같이 반복되는 내 삶, 그리고 눈, 신장, 다리... 몸 여기저기에 차례로 찾아오는 합병증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한 길거리에 화려한 또래들, 뭐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스물세 살의 아가씨들에 대한 질투심으로

내가 당뇨환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때 나는 당뇨환자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내 삶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내 삶은 비록 건강하지 못하더라도 바로  내 것이기에 고귀하다는 것을.

이제 내가 당뇨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켜야 할 것들을 따르면서 내 삶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리라 다짐해 본다.

비록 합병증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이겨내며 내 자신을 돌볼 것이다.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기엔 아직 너무 젊다.


더 이상 엄마를 눈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앞으로의 삶을 비뚤지 않게 또박또박 걷는 모습만으로도 엄마는 기뻐하실 것이다.

저기 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혈당 측정기와 주사기가 새삼 소중하게 여겨진다.

꿈속에서도 내 건강을 빌고 계실 엄마의 두 손에 살며시 내 얼굴을 비벼 본다.


 " 엄마,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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