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날이 오리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붙들고 살아왔지만 내게 기쁨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남편과 면사무소에서 함께 근무하며 사랑이 싹튼 나는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과 홀어머니의 외아들이라는
부담을 안고도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 날 어머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 네가 예뻐서 허락한 게 아니다. 내 아들이 하도 애원해서 허락한 거다. "
어머님은 마치 나를 당신의 귀한 아들을 빼앗아 간 못된 여자쯤으로 여기셨다.
정성 들여 맛난 음식을 준비해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새로 상을 차려 드셨고, 국을 올리지 않았다고 상을 엎기도 하셨다.
또 남편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엔 대신 나를 호되게 꾸중하셨다.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날 즈음엔, 어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라고 성화였다.
직장을 그만둘 형편이 아닌 데다 건강한 몸도 아니었기에 그 말씀은 내게 무거운 짐이 되었지만,
결국 거역하지 못하고 첫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어머님은 딸아리는 말에 매몰차게 돌아서서 미역국 한번 끓여 주시지 않았다.
물론 아기는 아예 봐주지도 않으셨고, 산후조리조차 못한 내게 끼니때마다 상을 차려오라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한숨과 눈물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얼마 뒤 어머님은 또 아들을 낳으라고 재촉하시는 게 아닌가.
아이가 백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더욱이 아무 말 없던 남편까지 한 번만 더 어머님께 져 드리자고
나서는 바람에 덜컥 둘째를 갖고 말았지만 또 딸이었다.
더욱 심해진 어머님의 냉대와 연년생인 두 딸, 쇠약해진 몸, 어머님과 나 사이에 끼여 어쩌지 못하는 남편...
모든것이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차츰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졌고 남편마저 술에 취해
퇴근하는 날이 잦아졌다.
이렇게 한없이 지쳐만 가던 내게 더욱 가혹한 시련이 찾아왔다. 술에 취한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사흘이 지나도록 의식불명이던 남편은 결국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제껏 든든한 등받이가 되어 준 남편이 하루아침에..
세상엔 때로 기적이라는 게 있다는 의사의 말도 나날이 불어나는 병원비 앞에서는 아무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며느리, 아내, 엄마의 역할을 모두 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어린 두 딸을 언제까지나 친정에 맡겨 놓을 수도 없었고,
집에 홀로 계신 어머님도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간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님의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내 몸을 덮쳐 왔다.
" 네년이 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었지? 어서 살려 놔. "
헝클어진 머리와 손톱에 긁힌 상처의 고통은 참을 수 있었지만, 어머님의 억지 섞인 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더 속상한 건 나인데, 왜 이러시나'하고 마음속으로 울부짖던 말을 결국 입 밖으로 쏟아내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님은 갑자기 멈칫하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입을 떼지 못하셨다.
다급하게 병원으로 옮겼지만 '치매' 진단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
그날 이후 판단력을 상실해 버린 어머님은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셨다.
' 사람이 이토록 비참해 질 수 있을까? ' 자문하며 하루하루 깊은 절망 속에서 지냈다.
피해자로부터 받은 보상금도 병원비로 모두 써 버리고 더 이상은 손 벌릴 곳도 없었다.
그렇게 6개월쯤 ' 남편이 살아있는 것만도 커다란 위로 ' 라는 말이 조금씩 사치가 되아갈 무렵,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 가족에게서 '장기기증'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울컥 화가 치밀어 펄쩍 뛰었다.
장기기증과 동시에 남편이 영영 사라져 버릴 걸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론 내 형편을 알고 조언해 준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나는 이성을 찾아야 했다. 더 이상은 나 혼자 힘으로 버텨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어머님을 생각하면 더욱 초조해졌다.
그 동안 나를 괴롭혔던 어머님을 택할 것인가, 일말의 기적을 기다리며 남편을 택할 것인가, 갈림길에 서고 만 것이다.
며칠 밤 잠 한숨 이루지 못한 채 고심했다. 그리고 어머님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의 애잔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용서를 빌었다.
" 여보, 당신 보내는 내 맘.... 알지요...? 우리.. 다음 세상에선 꼭 백년해로 해요... 어머님은 내게 맡기고 편안한 세상으로 떠나요.. "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결국 내 도장 하나로 남편의 몸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꾹꾹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리고 말았다.
어질러진 방 안에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어머님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지금 내 곁에는 아빠를 닮은 두 딸아이와 내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머님의 있다.
어느 순간 어머님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 길러 준 분이라는 사살을 떠올리며 그 원망을 떨쳐 버린다.
벽에 걸린 남편의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보며 오늘도 나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
- 좋은생각 '그러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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