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나가 뇌에 혹이 생거서... 수술하고 지금 회복실에 있는데, 너를 찾는다. "
갑작스런 누나의 수술 소식에 휴가를 신청하고 서울행 버스에 올라 네 시간여를 가는 동안 나는 몹시 불안했다.
병원에 도착해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외삼촌의 말을 듣고 만난 누나는 온몸이 퉁퉁부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았다.
손을 잡아도 이름을 불러도 누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린 시절, 폭력과 도박을 일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
내 어린 날의 그런 상처를 보듬어 준 이는 누나였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를 따라 목포 산골짜기에 살던 때,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밤새 어둠 속에서 나를 안고 있었던 이도 누나였고,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엔 한번도 내 손을 놓지 않던 누나였다.
내가 군에 입대하자 누나는 하루에 한 통씩 편지를 썼고,
모처럼 휴가 나가면 꼭 안아 주던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누나는 의지가 참 굳은 사람이기도 했다.
누나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도박빚 때문에 살림살이마다 압류 딱지가 붙었을 때도,
건넌방에서 엄마 아빠가 심하게 싸우는 소리에도 화장지를 입에 물고 눈물을 참으며 책에서 눈 한번 떼지 않았다.
누나는 그때부터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소원대로 누나는 우리나라 최고 병원 약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걸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운 것이다.
2000년 9월, 누나는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뒤 누나 짐을 정리하면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수년 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와 연락을 하며 경제적으로 돌봐 왔다는 것과
누나의 꿈은 성공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 우리 네 식구가 모여 사는 것이었음을...
또 자신의 병을 알고도 가족들을 위해 오랜 날들 동안 그 아픔을 혼자 참고 있었음을...
- 서길준 님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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