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자

그의 노예가 되어도 좋으리

극기상진 2019. 7. 1. 22:34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한두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 오형범 장로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지난 초여름 오 장로님은 뜬금없이 오는 8월 말에 중국 연길에 와서 그곳 장애인들에게 강의를 해 달라고 했다.

다만 조건이 있는데 그 첫째는 왕복 항공료를 전부 내가 부담해야 하고, 둘째는 강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이의 없이 찬성했다. 그런데 세번째 조건이 문제였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2~3백 명 정도 되는 장애인들의 저녁식사까지 나보고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28년동안 강의를 해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얼이 빠진 상태에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말았고, 약속대로 연길에서 세 가지 조건을 그대로 지켰다.

 1965년도 시골 풀무학원 촌뜨기 교사였던 내가 덴마크 유학이라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는데,

덴마크로부터 장학금과 왕복 항공권이 왔던 터라,나는 의심없이 용돈 한 푼 마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그때 공항으로 바래다 주던 택시 안에서 오 장로님은 내가 용돈 한 푼 환전하지 못한 것을 알고 당장 한국은행으로 차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는 그의 전 재산을 털어서 바꾼 이십 불을 내 손에 꼭 쥐어 주며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이십 불을 잊지 못한다. 그날 나의 손에 쥐어 주던 그 이십 불 때문에

나는 그의 영원한 노예로 살고 있다. 그의 터무니없는 제안도 거절할 수가 없다.

사람이 우정의 노예가 되는 데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사랑 때문에, 핏줄 때문에, 정 때문에, 이상 때문에...

오 장로님과 나는 이렇게 엉터리같이 살다 갈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삶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리라.

 

                                                        

                                            - '작은 것이 아름답다' 1999년 12월호 채규철 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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